Kuma's Curious Paradise
<상황과 이야기>를 읽고 본문
좋아서 두 번 읽은 책이다. 아마 세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작법에 대한 수많은 책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덮을 때, 글쓰기보다는 삶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좋은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묻는 동시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묻기 때문이다.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대리인이 아니다.
논픽션 작가는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거리를 둘 수 있는
변명과 낭패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소파에 드러눕는 거나 매한가지다."
소설가는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그의 그림자속에 숨을 수 있다. 시인은 목소리의 굴절 속에서 스스로를 가릴 수 있다. 그러나 논픽션 작가는 달아날 수 없다. 그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낭패와 변명, 불편한 욕망과 자기 소외까지도. 그것은 마치 공공의 장소에서 소파에 드러눕는 것과 같다. 문득 지하철에서 울던 낯선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모르는 척 지나쳤지만 사실 그 순간 그는 가장 진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글쓰기는 바로 그런 순간의 연장이 아닐까.
책은 조지 오웰부터 오스카 와일드까지 수많은 이름을 불러낸다. 조지 오웰은 <코끼리를 쏘다>에서 식민지 경찰로서 겪는 모순과 내적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도덕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 잃은 자신의 비겁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애컬리는 <아버지와 나>에서 가족사를 더듬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만, 바로 그 흔들림 덕분에 독자의 신뢰를 얻는다. 독자는 알아차린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이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세이란 결국 자기 탐구의 과정에 독자를 동반시키는 일이 아니던가.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조앤 디디온의 <침대에서>는 에세이가 끝없는 자기 폭로임을 증명한다.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힌 편두통은 단순한 신체적 약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탁물 분실, 끊임없는 전화벨, 집안일의 무게. 이 사소하지만 산발적인 짐들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편두통의 절대적 고통은 역설적으로 일상을 잠재운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내면은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회복한다. 디디온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그 연약함을 자신이 어떻게 견디어내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에드워드 호글랜드는 거북이를 집으로 데려왔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강물 속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그마저도 거북이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합리화 속에서 손을 놓으며 중얼거린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독자는 그 말 속에서 불편한 진실을 읽는다. 거북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임을. 호글랜드는 끝내 타자와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의 냉정을 체념한다. 그러나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일이 호글랜드에게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고닉이 말하는 자기 폭로는 이렇듯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분해하는 일이다. 기만과 두려움, 무능력까지 까내어 글의 긴장을 만드는 행위다. 오스카 와일드는 <심연으로부터>가 대표적이다. 와일드는 지성으로 가득 찬 매력적인 사내였지만, 정작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할 용기는 없었다. 글 속에서 그는 끝없이 자신을 분석하고 매일 다른 자기가 되기를 다짐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으로 살았다. 그의 무능력은 불편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력함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끝내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자신을 응시하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의 진실을 밎어내기도 하나 보다.
"일생의 막바지에 이르면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는 법은 터득하지만, 외로움에 맞서 싸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지켜보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카드를 섞거나 개를 돌보며 자신을 회피한다. 외로움에 대한 혐오는 삶의 욕구만큼 자연스럽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굳이 문자를 만들지도, 한갓 짐승의 소리에서 단어를 빚어내지도,
그저 남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대륙을 횡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루 밤낮이라는 짧은 시간이라도 비행기에 혼자 있으면 지독하게 외롭다.
어둑한 공간에서 관찰할 만한 거라곤 계기들과 내 두 손뿐이고, 생각할 거리라곤 내 빈약한 용기의 크기뿐이며,
궁금해지는 것은 어떤 믿음과 얼굴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 희망뿐이다.
이런 경험은 밤에 낯선 사람이 내 곁에서 걷고 있음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만큼이나 놀랍다.
그 낯선 사람은 바로 나다."
- 베릴 마크햄 <이 밤과 서쪽으로> 중에서
마컴의 글, <이 밤과 서쪽으로>는 결이 다르다. 그녀는 하늘 위에서 비행할 때 잠시 외로움에서 벗어나지만,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다시 외로움 속으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을 경멸하지 않는다. 외롭고 목적 없는 세상을 오히려 연민한다. 여기에는 어딘가 고결한 초연함이 있어서, 고독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볼드윈이 말한 ‘문명화의 부담’은 이 모든 논의의 윤곽을 완성한다. 문명인은 원초적 분노를 억누르면서도 이성적으로 싸워야 한다. 눈앞에서 불의가 벌어질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분노한다. 주먹을 쥐고 누군가를 갈기고 싶다. 그러나 문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 충동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일이다. 분노를 삼키고, 그것을 언어로 조직해내며, 제도와 사유의 틀 안에서 대응하는 일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는 이는 자기 안의 혼돈과 충동을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다듬어 드러내야 한다. 자신의 혼란을 통제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은폐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성적 목소리, 바로 그 모순의 자리에 에세이가 서 있다. <상황과 이야기>는 그 모순이야말로 글을 쓰게 만드는 내적 필요임을, 그리고 그 필요 속에서만 문학적 진실이 얻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책에 등장한 많은 작품들 중에 이미 뒤라스의 <연인>을 읽었다. 고닉만큼 책을 탐미할 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뒤라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잠시 나의 목소리 또한 듣는 순간이 있었다. 타인의 목소리 속에서 불현듯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에세이를 읽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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