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비(陳濞, ? ~ 기원전 162년)는 초한전쟁기의 군인이다. 전한 개국공신 서열 19위로 박양후(博陽侯)에 봉해졌다.
사인(舍人)으로서 탕군에서 종군하였고, 자객장(刺客將)으로서 한나라에 들어갔다. 도위가 되어 형양(滎陽)에서 항우를 쳤고, 몸소 길을 가로막고 초나라의 추격군을 쳐 죽였다. 전한 건국 후 공로를 인정받아, 고제 6년(기원전 202년) 박양후에 봉해졌다.
박양장후 40년(기원전 162년)에 죽으니 시호를 장(壯)이라 하였고, 아들 진시가 작위를 이었다.
전임 (첫 봉건)
|
전한의 박양후 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 ~ 기원전 162년
|
후임 아들 진시
|
|
---|
1 ~ 10위 | |
---|
11 ~ 20위 | |
---|
21 ~ 30위 | |
---|
31 ~ 40위 |
- 비어후 진하(31)
-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 무강장후 장불식(33)
- 여려[2]애후 주조(34)
- 대정후 대야(35)
- 세제후 여박(36)
- 해양제신후 요무여(37)
- 척구의후 당려(40)
|
---|
41 ~ 50위 |
- 동무정후 곽몽(41)
- 고원제후 병천(41)
- 악성절후 정례(42)
- 선곡제후 정의(43)
- 위기장후 주정(44)
- 창무정신후 선녕(45)
- 강양제후 화무해(46)
- 곡역헌후 진평(47)
- 동모경후 유조(48)
- 균장후 장평(48)
- 복양강후 진서(49)
- 의씨경후 진속
|
---|
51 ~ 60위 | |
---|
61 ~ 70위 | |
---|
71 ~ 80위 |
- 청간후 질중동
-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 영릉이후 여신
-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 자조단후 적|극주
- 오제후 양성연
- 당양애후 손적
-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 장절후 모택
- 기신광후 진창
|
---|
81 ~ 90위 | |
---|
91 ~ 100위 |
- 순경후 온개
- 역간후[5] 정흑(92)
- 고릉어후 왕주(92)
- 무원정후 위거
- 오방장후 양무
-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 분양(장)후 근강(96)
-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 송자혜후 허치
-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
---|
101 ~ 110위 | |
---|
111 ~ 120위 | |
---|
121 ~ 130위 | |
---|
131 ~ 137위 | |
---|
열외 | |
---|
※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 원래는 항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