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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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추(郭樞, 1338년 ~ 1405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곽예(郭預)의 현손이다.
생애
[편집]젊은 나이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했다가, 1360년(공민왕 9) 동진사(同進士) 12위로 문과에도 급제했는데, 당시 나이가 23세였다.[1]
공봉(供奉)을 거친 후[2] 여러 차례 승진하여, 1376년(우왕 2) 지신사(知申事)로서 성균시를 주관해 정희(鄭熙) 등 99명을 선발했고[3], 이듬해 첨서밀직사사상의(簽書密直司事商議)로서 『광통보제선사비 廣通普濟禪寺碑』에 이름을 남겼다.
1388년(우왕 14)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명에 파견되어 약재(藥材)를 내려 준 일을 하례했고[4],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1399년(정종 원년) 전 장군(將軍) 전흥(田興)을 자기 집의 종이라 하여 그에게 강제로 사역(使役)을 시킨 일이 있었는데, 전흥이 이를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자 그가 양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그 죄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정안공(靖安公)의 장인인 민제(閔霽)의 매부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고, 평주(平州)의 장원으로 유배되는 데에 그쳤다.[5]
1401년(태종 1) 예문관태학사(藝文館太學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며, 1405년(태종 5) 졸하자 왕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량(文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6]
평가
[편집]『태종실록』은 곽추에 대해 그의 졸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 | 곽추는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부귀의 족(足)함을 알아, 방자함과 사치함이 없었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여 선비를 (잘)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 ” |